Ursonography the Art Scene

인터랙티브아트를 주로 하는 미디어아티스트, 골란 레빈의 사운드아트, <우어소노그래피>. 레빈의 주요 관심사는 소리를 시각화하기다. 미디어아트의 단점은 처음엔 엄청 신기하다가, 금새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거다.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IT 환경을 생각하면 기술의존적인 미디어아트의 한계를 언급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냥 인터랙티브 미디어가 아니라 미디어 '아트'일 수 있는 작품들은 그렇게 수명이 짧지 않다. 양자의 차이는 바로 컨텐츠의 질 내지는 보편적 호소력에 있다. <우어소노그래피>가 다다이스트 쿠르트 슈비터즈의 <우르소나테>에 기반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하나의 동인인 것 같다.   

Ursonography (2005: Jaap Blonk and Golan Levin) is a new audiovisual interpretation of Kurt Schwitters’Ursonate, a masterpiece of 20th Century concrete poetry in which speech is reduced to its most abstract and musical elements. Dutch sound poet and virtuoso vocalist Jaap Blonk has performed the half-hour Ursonate more than a thousand times; in this presentation, Blonk’s performance is augmented with a modest but elegant new form of expressive, real-time, “intelligent subtitles.” With the help of computer-based speech recognition and score-following technologies, projected subtitles are tightly locked to the timing and timbre of Blonk’s voice, and brought forth with a variety of dynamic typographic transformations that reveal new dimensions of the poem’s structure.

The following 6'15" video at YouTube and Vimeo shows excerpts of the Ursonography 
performance from its premiere at the Ars Electronica Festival, September 2005 in Linz. The same video can be downloaded in better quality at the bottom of this page. It is essential to note that the poem's text was not added in post-production of this video: all dynamic typography in this concert was generated automatically, in real-time during the live performance, using custom software that responded to the timing and dynamics of Blonk's speech. Close synchronization of the text with the performer's voice was achieved by linking a score follower to a real-time syllable det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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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의 <소통의 기술> the Art Scene

덕수궁미술관에서 하는 <소통의 기술>전에 갔었다. 학생들에게는 "가볼만한 전시"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여태 보질 않았다. 시립미술관에서 도슨트 교육 강의하느라 2달째 시청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말이다. 오늘이 전시 마지막날. 며칠전 과천현대미술관 인턴교육 갔다가 받아온 초대권도 있고 해서 바람도 쐴 겸 나갔었다. 

마침 도슨트의 설명시간이어서 좇아다니면서 전시를 관람했는데, 난 비교적 평범했던 미디어전시보다도 도슨트의 해설능력에 더 감명받았다. 오늘이 전시 마지막날인걸 감안하면, 그녀가 얼마나 여러번 똑같은 해설을 했을까 짐작해볼 수도 있지만, 전문성과 열정을 함께 갖춘 도슨트의 설명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통의 능력"을 부여해줬다. 


[필리프 파레노 <스피치 버블즈> 2009]

물론 전시내용도 좋았다. 어쩌면 제목이 더 좋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각자의 개성적인 방식으로 소통을 도모하는 예술가들의 메시지는 대체로 전달력이 떨어진다. 그들의 소통의 기술은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형편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호기심을 자극하고 비주얼과 오디오로 관객들을 매혹하는 미디어와 설치작품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과 상상의 여지를 허용한다. 개인적으로는 알바니아 출신 미디어작가 안리 살라의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Long Sorrow>(2005)의 영상화된 섹소폰 연주는 내게 꽤 긴 여운을 남겼다. 

우리의 도슨트는 효과적이진 않지만 역설적인 예술적 소통의 힘에 대해 언급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곳의 관람객들에게 소통의 진정한 매개체가 되어준 것은 아리스트(!)의 작품보다는 훌륭한 도슨트인 것 같았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오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에 있었다. 언제부터 국내에서 미술관이 이렇게 대중적인 공간이 되었나? 비교적 최근인 것 같다. 적어도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는 선진국 수준인 것 같다. 

도슨트를 포함한 미술관의 인력수준도 나날이 높아진다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하는 시립미술관 도슨트 강좌에는 100명이 넘는 수강생이 꾸준히 출석한다. 처음 강의를 시작할 때 놀랐던 것은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꽤 많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고학력의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자녀들을 어느 정도 키우신 이후, 자기계발의 기회를 찾고계신 것 같다. 

처음엔 미술관 전문인력을 위한 강좌인데, 대중 강좌를 원하는 수강생이 많은 것 같아 좀 당황스러웠다. 강의를 좀 더 대중적인 눈높이로 맞춰가면서, 난 지금 이 시민강좌를 매우 즐겁게 하고 있다. 문화와 지식에 대한 갈증을 갖고 오신 어르신들은 대학생들보다 훨씬 호응이 좋다. (내 생각엔) 별것도 아닌 설명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아하~!" "우와~!" 그러면 난 또 흥이 나서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드리고...^^

이제 다음주면 도슨트 강좌도 마지막이다. 내 수강생 중에서 오늘 덕수궁에서 만난 분처럼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가득찬" 도슨트들이 마~~니 나왔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본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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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ible City modern art class


-----------Category: Pioneers of MediaArt----------- 
In The Legible City the visitor is able to ride a stationary bicycle through a simulated representation of a city that is constituted by computer-generated three-dimensional letters that form words and sentences along the sides of the streets. Using the ground plans of actual cities - Manhattan, Amsterdam and Karlsruhe - the existing architecture of these cities is completely replaced by textual formations written and compiled by Dirk Groeneveld. Travelling through these cities of words is consequently a journey of reading; choosing the path one takes is a choice of texts as well as their spontaneous juxtapositions and conjunctions of meaning.

The handlebar and pedals of the interface bicycle give the viewer interactive control over direction and speed of travel. The physical effort of cycling in the real world is gratuitously transposed into the virtual environment, affirming a conjunction of the active body in the virtual domain. A video projector is used to project the computer-generated image onto a large screen. Another small monitor screen in front of the bicycle shows a simple ground plan of each city, with an indicator showing the momentary position of the cyclist.
More info:http://www.jeffrey-shaw.net/html_main/frameset-works.ph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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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바라보기: 박현두의 사진에 관해 A&VC criticism

조명이 현란한 방송국 스튜디오에 복서가 서있다. 복서는 오락프로그램 세트장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의 존재는 도통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복서에게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위한 세트장은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공간은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기에 그에게 낯설 수밖에 없다. <Goodbye Stranger> 시리즈 2 3에서 박현두는 TV 세트장, 대규모 공연장, 해변가, 축구장 같은 대중적 오락공간을 주로 촬영했다. 그는 이런 스펙터클한 공간이 비어 있는 시간을 틈타 널찍한 공간을, 규모나 내용 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개인과 함께 포착해냈다. 정비된 축구장 사이드라인에 서서 안으로 들어가길 주저하는 조기축구회 회원은 TV 세트장의 복서와 조금 닮았다. 복서는 관중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갈망하지만 그에겐 그걸 얻어낼 자신이 없다. 그의 꿈은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살짝 벗겨진 아마츄어 축구선수는 비록 축구장에 있긴 하지만 그곳을 자신의 그라운드로 만들진 못할 같다. 자신이 스스로를 축구장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Goodbye Stranger 3>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장의 페이지터너나, 아이스링크의 어린아이, 해변가의 치킨배달부는 모두 축구장의 아마추어 축구선수처럼 자신이 속하고자 하는 공간에 위치하고 있으나 자의든, 타의든간에 그곳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소통의 단절, 자격지심, 고독과 절망, 부조리와 아이러니박현두는 지난 2003 이후 현대인이 흔히 겪는 소외감을이방인stranger’이란 단어로 표현해왔다. <Goodbye Stranger 1>에서 작가는 말그대로 이방인적 상황을 겪었던 자신의 유학생활을 일종의 퍼포먼스를 통해 표현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한국인 남학생은 난생처음 기이한strange 감정에 휩싸였다. 소외감은 일차적으로 소통의 단절 또는 무능에서 비롯된다. 작가는 언어와 문화가 낯선 곳에 머물면서 느꼈던 이방인의 감정, 그곳에 속하고 싶으나 온전히 속할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소외감을작은 의식 통해 온몸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풀장에 둥둥 떠있기도 하고, 옥상에 나체로 앉아 있기도 하고, 때론 노천의 그릴 위에 누워있기도 했다. 그릴 위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대형카메라로 담은 작품은 작가의 작업이 하나의의식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상징적이다. 그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낯설고 불편한 느낌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식을 통한 치유와 해방 이전에 작가에게 요구된 것은 스스로를 철저하게낯선 alien’ 인식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낯선 자로 살기와 완전한 제물되기( 스스로 죽기) <Goodbye Stranger 1> 공존하고 있다


양립불가능한 항의 병치는 박현두의 후속 시리즈에서도 지속된다. 토론프로그램 세트와 탁구선수는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모순적이다. TV 세트장에서 탁구를 한다는 사태 자체가 우리에게 상식적이지도 않거니와, 사유(언어) 행동, 진지함과 경쾌함 같은 대립항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호모순적인 항의 아이러니한 공존은 어쩌면 현대적 삶의 전형적인 양태일지 모른다. 전지구적 소통을 위해 개발된 TV 중계 시스템. 하지만 일방적 소통체계에서 현대인은 오히려 소통의 부재를 경험한다. 음악당의 페이지터너는 공간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공연이 시작되면 그의 존재는 청중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작가는 이와 같은 삶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인생이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이들이 있다. 가령 사뮈엘 베케트는 유명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부조리한 인생의 상황을, 자신들이 무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기다림의 순환구조에 갖혀있는 인물들을 통해 그리고 있다. 알베르 카뮈는부조리 실존철학적 사유의 귀결이 아니라 그런 사유를 촉발시킨 감수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방인> 뫼르소는 부조리의 감수성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낸 인물이다. 어머니가 죽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와 섹스하고 싶은 나의 살아있는 욕구를 부인할 수가 없다.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아랍인에게 총을 쐈다. 그것이 진실이기에실수였다 거짓말로 사형을 회피하지 않았다인간의 욕망 자체는 비이성적일 , 부조리하지 않다. 진실과 거짓, 합리와 비합리,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세상의 기준이 부조리하고, 그런 세상에 내던져진 개개인의 인생이 부조리하다


박현두가 말하고 싶은 이방인의 정체는 마치 뫼르소처럼 관습체계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인 것처럼 보인다. 작가 자신이 뉴욕에서 경험한 문화사이의 경계는 현대적 삶의 아이러니를 자각하게 계기가 되었다. 경계인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속해 있으면서도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자다. 그는 어느 한쪽에 속해 안주하고 있는 이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현재 작가는 그의 모티브를 좀더 보편적인 수준에서 펼쳐내는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Goodbye Stranger 4>에서 그는 인공암벽을 오르고 있는 사람들을 촬영한다. 미노타우로스를 닮은 거대한 인공암벽에 기어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다. 그들은 저기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최근 촬영한 작품에선 한스킨 빌딩을 타고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찔하게 높은 빌딩을 오르려는 사람들 자신도 등반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그저 위를 향해 오르고 있을 뿐이다. 다른 작품에선 숲속의 병원이 펼쳐진다. 이번엔 자연과 인공의 병치다. 숲과 병원, 이중 어디가 좋은 치유의 공간인가? 숲속 병동에 누워있는 환자는, 자연의 푸르름과 대조적인 창백한 흰색 때문에 마치 영안실의 시신처럼 보인다. 작품에 나타나는 초현실주의적 전치(dépaysement) 작가의 모티브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한다

박현두의 <Goodbye Stranger> 시리즈에선 작가의 아이디어와 연출력이 돋보인다. 초기의 자화상에서부터 최근의 6번째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현대인의 소외의 경험과 부조리의 감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작품의 스펙터클하고 완성도 있는 화면을 보면, 모델과 장소 섭외부터 촬영과 인화에 이르기까지 그가 했을 수고를 짐작할 있다. 작가는 그릴 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나 인공암벽을 오르는 사람들의 장면을 통해 소외나 아이러니 같은 진지한 주제를 너무 무겁지 않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자 했다고 한다. 관객들은 작가가 제시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을 흥미롭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의 부조리와 아이러니의 감각이 과연 관객에게 전달될지는 의문스럽다. 배후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작품의 주제의식뿐 아니라 유머감각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물론 작가의 의도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작품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니다. 더욱이 작가의 손을 떠난 이상, 작품은 작가의 분신도 소유물도 아니다. 관객들은 필경 작가가 연출해낸 스펙터클에 매료될 것이다. 이후 작품의 매력을 이방인적 현대인의 감수성으로 수용하느냐 마느냐는 저마다의 경험과 역량에 달려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제5기 입주작가 박현두에 관한 비평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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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vs. 바로크 건축 미술이야기

뵐플린이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구별한 것은 비단 회화와 조각에서만이 아니고, 건축도 포함됩니다. 즉 건축에서도 선적인(촉각적) 양식과 회화적(시각적) 양식이 대별된다는 것이죠.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적 사례로는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성베드로 성당(1506-1626)이 있습니다. 

Panorama showing the facade of St Peter's at the centre with the arms of Berninis colonnade sweeping out on either side. It is midday and tourists are walking and taking photographs.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열주와 돔, 박공(정문 위의 삼각형 구조), 아치, 아케이드 같은 건축적 요소들이 보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 양식에서 가져온 요소들이죠. 어쩌면 유럽 도시들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고전주의 양식입니다. (이 성당은 100년 넘게 걸려 지은 것이고, 광장은 바로크 시대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가 했습니다.) 파리 중심으로 발달했던 중세 고딕양식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오른 첨탑, 매우 복잡한 외부 조각과 버팀목, 그리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래스가 특징인데 반해, 르네상스 건축은 성당이나 궁전은 좀더 절제미가 있습니다. 르네상스 때는 건축에서도 고대 복고주의가 유행이어서 중세보다 실용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양식을 선호했습니다. 

르네상스 건축이 이태리를 중심으로 부활한 고대의 인본주의 영향을 받았다면, 바로크가 등장하던 시기는 다시 카톨릭 신앙의 영향을 받습니다. 르네상스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기도 했는데, 16세기 중반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도 자체적인 개혁운동을 했었죠. 그것을 카톨릭 종교개혁 또는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합니다. 다시 일반 민중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카톨릭 교회는 교회 건축의 내부와 외부를 좀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기 시작하죠. (회화와 조각이 더 드라마틱해진 것처럼 말이죠.)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건축양식을 따르지만 장식적 요소들을 더 가미하고 운동성을 띠는 방식으로 배치를 합니다. 보로미니의 파동벽면, 와형장식, 타원에 가까운 평면설계 등은 대표적인 바로크 양식의 요소들입니다. 

     

보로미니가 설계한 로마에 있는 San Carlo alle Quattro Fontane 성당(1634-1642)의 파사드 부분입니다. 운동감이 더 느껴지지 않나요? 바로크 초기라 아직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죠? 


니콜라 살비가 1732-62년에 만든 트레비 분수도 바로크 양식이죠. 바로크는 원래 울퉁불퉁하게 못생긴 조개를 일컫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17-8세기 당대의 예술가들은 그들이 고전주의의 계승자라고 여겼지만, 그들의 화려하고 때로는 과장된 양식 때문에 고전주의를 선호하던 비평가들이 폄하하는 의미에서 바로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죠.  

뵐플린은 선적인/평면적/명료한 양식은 르네상스 건축에서 잘 나타난다고 하면서, 르네상스 건축에도 외부 조각과 내부 장식 같은 장식적 요소들이 있지만, 각각은 독립적이어서, 눈을 감고 그 공간을 거닐어도 느낄 수 있는 잘 짜여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바로크 건축의 역동적인 구성에는 회화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그 공간 구성의 겹침과 장식적 요소들이 빛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마치 르네상스의 안정된 구도의 회화를 감상할 때처럼 고전주의 건축도 어느 한 지점(주로 정면)에서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반면, 바로크 회화는 보는 시점에 따라 건축의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지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함과 화려함은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후 프랑스 궁정을 중심으로 로코코 양식이 유행하고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양식이 나타나죠. 18세기 말에는 다시 신고전주의가 등장하는데, 이는 로코코 양식의 장식성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고 시민계급 중심의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질서에 대한 표상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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