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편이 강추해서 어제 투표하고 나서 같이 보고 왔어요.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읽지 마시길... ^^]
시를 쓰고 싶은 한 여인이 있다. 미자(윤정희 분)는 꽃을 좋아하고 시와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관심과 애정이 많은 여인, 60대의 젊지 않은 나이에도 늘 멋지게 차려입기를 즐기는 여인이다. 사실 그녀의 남루한 삶은 시나 아름다움, 꽃단장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미자는, 이혼하고 대도시로 돈 벌기 위해 떠난 딸 대신 외손주를 키우고 있고, 변변한 수입이 없는 생활보호 대상자다. 하지만 동네 수퍼 주인집의 가사도우미를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꾸리고 있다. 도우미일을 하면서 반신불수의 주인집 시아버지(김희라 분) 목욕도 시켜줘야 했기 때문에 아마 다른 도우미보다는 좀 더 챙겨 받았을 것이다.
시쓰기를 배우기 위해 문화원의 문학강좌를 찾아간 미자는 시인인 강사(김용택시인 분)의 말을 따라 "일상에서 시상(詩想) 찾기"에 몰두한다. "엄마는 꽃도 좋아하고 가끔 엉뚱한 소리도 잘 하니까 시인기질이 있어"라고 했다는 딸의 말대로 그녀는 시적인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런데 사실상 미자는 좀 현실감각이 떨어져 보인다. 그녀는 의사가 "초기 알츠하이머 증상"을 진단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외손주가 저지른 사건의 심각성도 크게 우려하는 것처럽 보이지 않는다. 외손주와 친구녀석들은 고작 중3인 주제에, 동료 여학생, 희진(세례명, 아녜스)을 돌아가며 강간했다. 그로 인한 고통때문에 희진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살짝 제 정신이 아닌 것처럽 보이는 우리의 주인공은 외손주에 대한 질책도, 그의 장래에 대한 염려도 별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단지 죽은 희진 때문에 몹시 마음아파 하는 것처럽 보인다.
갑자기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알고 보니 손주녀석 친구의 아빠다. 미자는 그를 따라 가해 남학생 아빠들의 모임에 간다. 3000만원을 위자료로 피해자에게 줘야 한단다. 그렇다면 1인당 500만원씩 내야 한다. 미자에겐 그것은 아주 큰 돈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씩 발동하고 있는 치매증상 때문에 자주 잊고 있는 것인지 외손주의 사건을 뒷전으로 한채 시상을 찾아 다닌다.
"시간은 흐르고 꽃은 시들고"
미자는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싯구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를 한다. 한때 남자깨나 울렸던 그녀가 이렇게 시든 것처럼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간다. 미자는 붉은 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다른 학부형들이 아들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슬며시 밖으로 나가 빨간 맨드라미를 관찰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빨간 꽃은 또 장미와 동백이 있다. 장미는 시사랑 동호회의 시 속에서, 동백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러 갔던 의사의 진료실에서 등장한다. 모든 사람을 (아무리 60대 중반이라 하더라도!) 절망에 빠트릴 치매 진단에도 미자는 "아, 나 동백꽃 좋아해요. 빨간 꽃은 '고통'을 의미한대요"라고 신이 나서 떠든다.
사실 미자가 현실감각이 없는 여자가 아니다. 단지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녀의 속내엔 무엇이 있나? 딸, 손주, 자살한 동네 여학생,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시키는 회장님(김희라)... 에 대한 애정과 아름다운 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더이상 시를 쓰지 않는 시대, 심지어 "시는 죽었다"는 시대에 이 촌스럽고 비현실적인 여인은 시를 갈구한다. 아니, 아름다움을 갈구한다. 하지만 외손주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녀는 인생이 그닥 아름답지 않고 되려 추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시상이 펼쳐졌던 것 같다.
미자는 <아녜스의 노래>와 함께 하얀 꽃다발을 시인선생님께 바치고 사라진다. 흰 꽃은 '치유'를 의미하는 걸까? 죽음도 치유의 한 방편일 수 있겠다. (난 미자가 흰꽃을 헌사하고 강물에 투신했다고 생각한다.) 미자의 목소리로 낭송되던 <아녜스의 노래>는 어느덧 희진의 목소리가 되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가해 남학생 아빠 중 하나가 말한 것처럼 별로 예쁘지도 않은 여학생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해맑게 웃는 여학생은 흐르는 강물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있다. 영화 속의 아녜스는 두 명이었다. 미자와 희진, 두 명의 아녜스가 주인공이었다.
또 다른 두 아녜스가 떠오른다. 윤석화가 오랫동안 열연했던 <신의 아녜스(아그네스)>의 아녜스. 그것은 희진이다. 참고로 성 아녜스는 순결과 소녀의 수호성인이다. 또 밀란 쿤데라의 <불멸>에 나오는 아녜스가 있다. <불멸>은 액자소설이다. 소설 속의 소설가는 스포츠센터에서 우연히 목격한 할머니급 아줌마(딱 미자 나이다!)의 수줍은 여성적 몸짓에서 '아녜스'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창조한다. 소설 속의 아녜스는 40대의 비교적 젊은 여인으로, 마치 미자처럼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막연하게 선량한 삶을 추구하는 다소 비현실적 캐릭터다.
어쨌든, <시>에 등장하는 두 아녜스는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가 된다. 그녀들에게 물어보자. 인생이 아름다운가? 아니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슬프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녜스의 노래>가 나왔겠지... 시상을 찾아 헤메던 미자가 변화하는 과정은 자못 흥미롭다. 막연히 인생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미자가 자신에게 성적(sexual) 요구를 해오던 회장님에게 돌아가 자선(?)을 베풀 때, 아니 강가에서 추적추적 비를 맞으면서 자선을 베풀 결심을 할 때, 아마도 그녀는 문득 "인생은 얼마나 추하고 불쌍한가" 생각했을 것 같다.
피해자와 가해자, 남자와 여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누가 더 불쌍한가? 양자를 구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우리는 모두 불쌍하고 위로가 필요한 인생들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나 쓰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시쓰기를 우롱하는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아녜스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아래에 시를 옮겨 본다.
<아녜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놀랍게도 이 시는 이창동 감독이 쓴 거란다. 포스터의 '시'라는 글자도 본인이 쓴 거고... 이창동 감독께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시(poetry)를, 영화를 만드신 분께 말이다. 그렇지만 난 좀 다르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고통이고 예술은 치유라고.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괴롭고 추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아름답다는 것은... 포스터에도 써있듯이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이고, 고통스러운 삶에 치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창동은 네말이나 내말이나 똑같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2009년 1월 <씨네21> 정한석과의 인터뷰에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아름다움의 의미, 예술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창동의 생각이 내 생각과 좀 다른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미자가 회장님에게 돌아가 자선을 베풀던 장면에서 나는 문득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떠올랐다. 니나가 성불구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던) 노교수(헤르만이었나? 잘 생각 안난다)에게 찾아가 잠자리를 해줬던 장면이 연상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니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돌아보니 미자와 니나의 자선행위는 치유행위였다. 그런데 미자는 뒤늦게 자신의 선심을 매춘으로 전락시킨다. 물론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 장면은 우리 인생의 불가피한 고통과 추함을 오히려 역설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녜스의 노래>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나는 꺼이꺼이 우느라고 일어나질 못했다. 남편이 물었다. "미자가 너무 불쌍하지?" 내 대답, "아니야. 인생이 다 불쌍하고, 너무 슬퍼..." 그 슬픔의 깊이를 윤정희가 담담하게 잘 소화한 것 같다. 구본창이 찍어준 포스터가 그녀의 아우라를 배가시킨 것 같기도 하지만... 이건 단지 여자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죽은 전직 대통령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감독 본인에겐 어떤 의미를 가질지 난 모른다.) 인간의 보편적 감수성을 전달하기 위해 감독이 설정한 캐릭터 양미자역엔 관록있는 배우, 윤정희가 정말 제격이었다. 그래서 이창동이 윤정희의 본명, '미자'를 주인공 이름으로 택했겠지... 여하튼, 오랫만에 가슴을 두드리는 영화 한편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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